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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학과를 다니면서, 언젠가 공간감이 있는 설치미술 전시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학생회가 주최하는 예술디자인대학 통합 전시에 작가로 참가했었지만 한 작품 당 90cm*90cm 정도의 작은 전시 공간만이 제공됐었다. 작품으로 '공간감'을 구현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운이 좋게도 막학기에 4D아트융합전공의 선택 과목인 4D실행예술에서 설치 미술 작품을 만들어볼 기회가 주어졌다.
4D아트가 뭔데?
4D아트가 무엇인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 잠깐 설명하자면,
2D = 회화
3D = 입체, 공간
4D = 3D + 시간성
...이라고 보면 된다. 시간성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작품이 움직이거나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가장 간단하게 예시로 들 수 있는 4D아트는, 얼음으로 만든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녹으니까! 반대로 작품이 고정돼 있어도, 보는 이로 하여금 걸어다니거나 움직이면서 작품을 관람하게 만들면 시간성이 생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4D아트라고 정의하지만 않았을 뿐, 이미 많은 예술 작품들이 4D아트에 해당되는 것이다.
일단 이목부터 끌어야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해당 수업의 교수님은 디자인 업계에서 활동하며 팝업전시 의뢰를 여러 번 받고 진행한 경험이 있었다. 전시 작품의 예술성보다도, 실제로 해당 작품이 관람객들에게 전달력을 갖기 위한 방법에 대해 코치해 주셨다. 전시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실제로 설치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고려사항과 계획 방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특히 강조하신 부분은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보게 만들 것인가'부터 고민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훌륭하고 테크니컬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보게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예술디자인대학 통합전시에서 맛본 실패의 경험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딱 그랬다. 내 작품의 가치를 자신했지만... 막상 전시장에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존재감이 너무 흐릿해 사람들이 잘 보질 않았다. 예술을 너무 순수하고 고결한 것으로만 여긴 나머지, 마케팅적인 측면은 생각하질 못한 것이다.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는 자세히 들여다본 후에야 발견된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람객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결국 인간이 본능적으로 감탄하는 요소들은 의외로 단순하다.
- 주변과 다른 독특한 외관
- 압도적인 크기와 스케일
- 놀라운 양과 작업량 (노력과 시간의 양)
위의 내용을 종합해 교수님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와우 포인트'를 만드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강조하셨다.
첫째,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성이다. 주변의 것들과 다르게 보일 때 사람들의 시선을 더 쉽게 끌 수 있다.
둘째, 작품에 쏟은 압도적인 노력과 시간이 드러나야 한다. 이는 작품의 규모나 작업량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수업에서 만드는 작품은 위 두 가지 목표에 초점을 두고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규모와 작업량을 확보하기 위해 수강 인원이 다같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로 했고, 제작이 쉬운 단순한 형태(직육면체)를 활용해 작품을 구성했다. 그리고 작품을 오래 머물며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요소로 텍스트를 활용했다. 입체적인 설치 작품 겉면에 AI로 만든 소설을 띠처럼 붙여 읽어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래 작품, <문자의 숲>이다.
U자 형으로 박스 기둥 형태의 작품을 배치하여, 공간감을 창출함과 동시에 하얗고 거대한 덩어리감을 만들었다. 실제로 사람이 들어가서 작품을 구경할 수도 있다.
작업과정에서 배운 것
일단 만들고 보자
무엇이든 일단 만들고 보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해당 전시 작품 작업은 내가 해본 그 어떤 단체 작업 보다 빠른 페이즈로 이루어졌다. 사실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 구상 단계에서만 엄청난 시간을 쏟을 수도 있었다.
작품의 재료는?
사이즈는?
형태와 구조는?
작업 방식은?
메시지는?
학생 때는 시간이 비교적 많다 보니, 이런 단계에서 회의를 너무 오래하는 경우가 많다. 팀원 별로 원하는 것이 다르고 관철하고 싶은 바가 있는 경우에는 서로를 설득하느라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다들 학생이라 경험이 적어, 각각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팀원과의 지지부진한 협업에 지쳐 교수님께 상담을 받아본 적도 있었다. '누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대충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너네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단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지...'라는 답이 돌아왔었다. 그리고 이번 <문자의 숲> 작업을 하면서 주어진 기간과 팀원의 실력에 맞는 현실적인 작품 형태와 사이즈를 선택해 차라리 빨리 한 번 만들어보는 게 낫다는 걸 알았다. 일단 사이즈별로 박스를 만들어 눈으로 본 뒤에 작업 사이즈를 결정했고, 한 차례 박스를 완성해보면서 더 적합한 작업방식을 찾아나갔다. 그동안 리스크를 줄인답시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시간만 너무 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거롭더라도 한 번 만들어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나면 공간을 기획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결국 직접 공간을 조성하고 눈으로 본 경험이 쌓여야 내 꿈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전까지는 남모를 불안이 있었다. 공간의 재료, 구조, 분위기 등을 기획하는 감각이 내심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야 타고나길 감각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공간을 만들어본 경험이 적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대학원에 유학을 가서 보게 될 중국의 다양한 공간을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지, 내가 직접 공간을 만들어보는 기회를 어떻게 얻어낼 것인지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작품에 대한 아쉬운 점
주어진 기간과 우리들의 능력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래도 작품 자체에 남는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작품 겉면에 붙인 텍스트이다. 박스 같은 경우에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퀄리티가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지만, 텍스트의 경우에는 A4용지를 프린트해 오린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글자 크기가 좀 더 컸거나, 용지의 색상이 좀 더 박스와 비슷했다면 작품 전체의 퀄리티가 높아졌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텍스트를 어디에 어떻게 붙힐 건지에 대한 설계가 좀 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현재 작품에서는 기둥 하나당 하나의 AI소설을 빙 둘러서 붙여져 있는데, 실제로 관람객이 기둥을 빙빙 돌며 읽기에는 다른 기둥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쭈그려서 기둥 아래쪽에 붙은 텍스트를 읽기도 어렵다. 소설 별로 텍스트 색상을 다르게 해, 어떤 텍스트끼리 연결되는지 확실히 보여주거나, 기둥 간 간격이 좀 더 조정되거나... 텍스트가 이어지는 방향이 달랐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
이번 작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 갖고 있었던 설치 미술 작품 아이디어를 어떻게 나의 능력치 내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어떻게 보여줄 것이고, 어디에서 보여줄 것이며, 나에게 지속적인 작업 방식인지 따져보면서 말이다. 졸업하기 전에 공간 기획의 첫걸음을 떼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